Skip to content

조회 수 86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30여년 전을 생각한다- 박노자

서울대 백아무개 강사의 자살 관련 보도를 읽었을 때, 필자는 문득 30여년 전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생각났다. 물론 두 사람이 비극적 최후를 택한 동기는 달랐다. 전태일의 자살은 노동자로서 투쟁의 마지막 단계였던 데 반하여, 백아무개 강사의 경우에는 ‘시간강사’로서 부딪히는 암울하고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절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건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한 역사적 단계에서 생산수단의 발전에 가장 많이 기여한 한 피억압계층의 대표자가 그 발전에 기생하는 착취자의 오만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기 생을 마감한 것이다.
30여년 전 한국의 ‘굴뚝산업’이 본격적으로 세워졌을 때 공업노동자들은 생산 발전의 ‘주력부대’였다. 그러나 그들이 받았던 대접은 살인적인 저임금에다가 장시간의 고강도 노동, 기업운영권으로부터 소외였다. 노동자가 자본의 소모품에 불과한 현실에 전태일은 분실자살로써 맞선 것이다.

오늘날 굴뚝산업이 사양의 길로 접어드는 한국이 10여년을 허송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식산업 위주의 사회로 재편돼야 한다. 굴뚝산업이 어차피 인접 저임금 지대로 계속 이전되는 지금, 같은 문화권의 중국·베트남 대학생들이 찾아올 수 있는 한국으로서는 고등·전문교육 서비스가 제3의 수출 부문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해외 유학생 수가 해마다 15% 이상 오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길이 최적의 선택일 것이다.

한국이 극동지역 문화·교육 서비스 수출의 새 중심으로 떠오르는 이 역사적인 ‘제2산업화’ 시대의 주력부대는 누구인가 시간강사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교육산업의 비정규직 숙련 노동자들이다. 이들 6만여명의 비정규직 교단 노동자들이 대학수업의 절반 이상을 담당할 뿐 아니라 첨단 연구프로젝트의 연구 노동력이 되기도 하고 한국을 구미의 최신 연구서적이 들어오는 ‘번역의 왕국’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인접 국가 학생이 찾아올 만한 참신한 연구와 교육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고에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수업 준비, 채점, 번역, 연구, 교수의 연구 보조나 논문 대필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과는 때론 30여년 전 공업노동자의 일과보다 길다. 강의 배정을 담당하는 교수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불안정한 신분은 노동법이 먼 시절 산업노동자의 신세와 다르지 않다. 30여년 전 하급 공업노동자의 소득이 도시민 평균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쳤듯 시간강사층의 가구소득도 도시민 평균의 50~60% 정도다. 학생들이 학교 당국을 상대로 주장을 펴긴 하지만 강사노조가 있는 학교는 드물고, 강사의 파업은 30여년 전 산업노동자의 파업처럼 하기 힘든 일이다. ‘지식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소장 학자들이 교육자본의 ‘먹이’가 되는 상황은 많은 이들에게서 삶의 희망을 빼앗기도 하고 지식·문화사회로의 전환을 방해하기도 한다. 설령 세계적인 천재적 두뇌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강의가 없는 방학 때 아이들의 비싼 양육비 걱정으로 잠 이루기 어려운 사람이 창조적이며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내기 쉽겠는가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고정급 지정이나 연구비 증액 등의 방안도 의미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분의 안정화와 결사권, 그리고 나아가서는 학교운영 참여권의 보장이다. 한 번 임용된 이상 ‘비상근 교원’으로서 위치가 부여돼 ‘엿장수 마음대로 해고’가 불가능해야 교수가 강사를 머슴으로 부리는 추태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강사노조가 임단협의 주체로 나서고 교수나 학생, 직원과 함께 학교운영의 떳떳한 주체가 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수많은 백씨’들을 죽음 아닌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해갈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3/06/001000000200306222210009.html
?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글쓰기 및 편집 방법 2 file 다중이 2016.06.12 49001
381 내 살다가 이런 눈은 처음이다` -포토 에세이 (오마이뉴스) 운영자 2004.01.22 11279
380 내 억울함 교육부·교육청도 외면- 오마이뉴스 운영자 2003.04.16 8762
379 내가 거듭나고 보니 김기태님글 2006.08.09 8947
378 내년에는 이 정도는 올라야 할 텐데 플로렌스 2012.10.27 8968
377 너 자신을 알라 기적수업 2006.03.29 9703
376 너는 생각에 대해 책임이 있다 기적수업 2006.10.13 8267
375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홍미숙 2009.01.30 8168
374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군단 토론 후일담 운영자 2003.03.09 8898
373 노무현과 완전한 나라 -한겨레 운영자 2003.04.05 9043
372 노무현의 변신은 과연 무죄인가? 운영자 2003.05.17 8056
371 노엄 촘스키 `미국은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할 것` -프레시안 운영자 2003.04.15 8816
370 노엄 촘스키 `제국과의 대결` 강연 링크 [필독) 운영자 2003.03.13 9595
369 님은 먼곳에 7 플로렌스 2011.07.12 25322
368 다문화로 가는 데 멀고 먼 한국 3 ch 2011.01.11 18142
367 다시 일터로 돌아와서 2 문준혁 2010.05.03 10073
366 다하지 못한 논의 1 SOON 2010.01.23 7941
365 단 한가지의 목적 기적수업 2006.04.06 8690
364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1 마틴 2009.10.13 10582
363 대운하에 대한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퍼옴 이동진 2008.04.17 7974
362 대중가요 하숙생 로즈마리 2007.12.13 8293
361 대통령 선거 논쟁에서 주목해야 할 것 플로렌스 2012.10.06 9036
360 데미안과 함께 떠나는 카발라 여행 구정희 2006.05.08 8566
359 동물의 세계_The Bear 3 프로방스 2012.02.22 10300
358 동양인 서양인 관점의 차이 마틴 2010.05.13 11516
357 동영상_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1 마틴 2009.05.25 8412
356 또 하나의 각도 페다고지 2003.04.18 9170
355 또다른 미국과 기독교인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Jesus Camp) 2 뚜버기 2011.02.06 16928
354 룡천역 일대 불바다..곳곳서 울부짖음 운영자 2004.04.24 15780
353 르완다, 식민분리주의의 악몽-한겨레 운영자 2004.04.15 72475
352 리빙 스피릿 교회를 다니며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Jane Lee 2004.01.02 1054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20 Next
/ 20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